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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사진방♣

1400년된 황금 사리함

 

2007년 10월 24일 (수) 11:18   조선일보

백제 황금사리병 1400년 만에 빛나다



▲ 백제 위덕왕(재위 554~598)이 죽은 왕자를 기리며 정유년(서기 577년) 2월에 왕흥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담긴 사리함(사리를 담은 함) /문화재청 제공


▲ 사리함 몸체에 새겨진 명문 기록 /문화재청 제공


▲ 왕흥사터에서 출토된 각종 진단구 /문화재청 제공

백제 위덕왕(재위 554~598)이 죽은 왕자를 기리며 정유년(서기 577년) 2월에 왕흥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담긴 사리함(사리를 담은 함)이 발굴됐다. 백제의 왕 이름이 새겨진 유물이 발굴된 것은 무령왕릉(1971년)과 역시 위덕왕의 생전 이름(=昌 창)을 새긴 사리감(1994년)에 이어 세 번째다. 그간 부여 왕흥사는 삼국사기에 따라 서기 600년(백제 법왕 2년)에 일부 건설된 뒤 서기 634년(무왕 35년)에 완공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번 발굴로 577년에 축조됐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24일 부여 왕흥사터 목탑터에서 발굴된 사리함과 사리장치 등을 공개했다.

위덕왕의 생전 이름인 창(昌)의 이름이 적힌 사리함(높이10.3㎝)은 목탑의 기둥을 세우는 장치인 심초석(크기 100×110㎝) 남쪽 끝 부분에 16×12×16㎝의 크기로 마련된 사리공(사리함을 담기 위해 마련한 공간) 내부에 봉안돼 있었다. 사리공은 화강암 뚜껑으로 덮여 있었다. 사리함은 원통 모양의 청동 사리외함에 은으로 만든 사리병,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금으로 된 사리병 등 3중’으로 구성돼 있었다. 청동사리외함은 꽃봉오리 모양의 볼록한 뚜껑으로 덮었다. 사리는 그러나 발굴되지 않았다.

명문은 사리함 몸체에 다섯자를 기준으로 여섯행 새겼다. 내용은 ‘丁酉年二月(정유년 이월)/十五日百濟(십오일 백제)/王昌爲亡王(왕창 위망왕)/子 立刹本舍(자 립찰 본사)/利二枚葬時(리이매장시)/神化爲三(위화위삼)’이다.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의 생전 이름)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웠다. 원래 사리 두 매를 묻었는데 신의 조화로 셋이 됐다’는 내용이다.


부여문화재연구소측은 이 기록을 통해 그 동안 삼국사기의 기록에 600년(법왕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35년)에 낙성된 것으로 알고 있었던 부여 왕흥사의 실제 축조 연대가 577년(위덕왕24년)이라는 것과, 위덕왕이 597년(위덕왕44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阿佐)태자 이외에 또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연구소측은 “명문과 사리구의 구성 내용을 통해서 절의 축조가 역시 위덕왕 대에 만들어진 능산리사지(서기 567년) 보다 10년 뒤에 조성됐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백제사 시대 구분과 당시 고고학적 자료 연구에서 중요한 전기가 마련됐다”며 “백제 위덕왕대의 정치 사회 문화적 흐름을 연구하기 위한 새로운 단서를 확보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생전 이름이 창이었던 위덕왕은 왕자 시절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적장과 1대 1로 맞붙어 적장의 목을 벤 것으로 일본 최고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도 기록돼 있다. 그러나 아버지인 성왕이 신라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중이 되겠다고 결심했지만, 신하들이 말리면서 왕위를 잇게 됐다.

이번 발굴에서 출토된, 건축물을 세울 때 액을 없애기 위해 땅에 묻는 진단구는 심초석 남쪽을 중심으로 다량 출토됐다. 목걸이 및 팔찌, 비녀, 금제귀고리 등 장신구로 사용했던 구슬류와 옥류, 금제품, 금동제품, 은제품, 관모장식 등을 비롯하여 중국 남북조시대의 북제(550~577년)에서 사용했던 상평오수전 등 다량의 유물이 나왔다. 연구소측은 백제시대 장신구 연구와 귀금속 제작, 대외관계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백제는 성왕 때부터 중국에서 사리신앙의 영향을 받아 위덕왕대에는 일본에 사리와 함께 승려와 장인(匠人)을 파견하는 등 불교 문화의 일본 전파에 주된 역할을 했는데 이번 사리구와 진단구는 이러한 백제 불교 문화의 우수성과 국제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연구소측은 이번 발굴의 중요한 성과를 종합하면 첫째, 최초로 백제시대 목탑터에서 사리장치가 봉안된 사리장엄구가 확인됐다는 것과 함께 둘째, 사리함에서 왕흥사 창건(577년)과 관련된 명문 기록이 나왔다는 점, 셋째 사리기를 모신 예술적 수법이나 목탑 심초부 조성에 대한 새로운 기법이 확인됐고 마지막으로?사리구를 포함한 백제시대 귀금속 및 장신구 등 다량의 진단구가 출토되어 당시 공예기술의 우수성을 확인했다는 점을 들었다.




[신형준 기자 hjsh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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